Secret Garden - 제18회 석주미술상기념전, 선화랑 (4층) > 작품

'사랑'은 내 예술세계의 모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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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is the motive of my art world

2009 Secret Garden - 제18회 석주미술상기념전, 선화랑 (4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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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9회 작성일 22-06-0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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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시대의 메시아를 찾아서


김영호 (미술사가·미술평론가)



프롤로그


전통적 조소예술의 영역에서 출발하여 뉴미디어와 테크놀로지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들며 활동해온 심영철의 예술영역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빗의 형상을 석재와 목재로 다양하게 변주했던 <빗의 단계적 표상> 시리즈를 필두로 시작된 25년간의 발자취를 보면 그의 예술은 네온과 홀로그램을 포함한 설치작업과 비디오 영상 이미지에서 퍼포먼스에 이르는 매체와 기법을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주로 실내공간에서 작업이 이루어지던 <전자정원> 시리즈에서 도심과 자연공간으로 확대된 <모뉴멘탈가든> 시리즈, 그리고 지하철 공간에 이르기까지 설치장소도 정해진 한계가 없어 보인다. ‘예술의 종말’ 이후의 상황을 현대미술의 시대로 규정하는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견지에서 보면 심영철의 의욕적인 작업 성향은 우리가 완전한 ‘예술적 다원주의’의 시대 속으로 진입하였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심영철의 작업에 나타나는 매체나 표현기법 그리고 설치장소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점은 그의 예술세계에 접속하기 위한 키워드는 종교적 의미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의미란 이 글의 뒤에서 좀더 살펴보아야할 특성을 지닌 것으로서 심영철의 작품세계를 진단하기 위한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혼돈스럽기만 한 오늘의 예술적 환경을 살아가는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대안적 과제라는 측면에서 연구의 당위성을 지닌다. 미술사의 정론이 와해되고 역사적 이념의 줄기가 해체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예술에 대한 종교적 성찰은 열정과 순종 그리고 모순과 방황의 정체를 파악케 하는 하나의 지표(index)이자, 자유와 속박이라는 날줄과 씨줄로 짜인 현대적 삶 그 자체를 진단하는 원리로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UCLA, Otis-Parsons와 Golden State University에서 5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989년에 귀국하여 <Jesus Love You>라는 제목으로 갤러리 동숭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이래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심영철은 자신의 작품에 성령, 순례자, 존재, 섭리 등의 종교적 메시지를 일관되게 적용시켜왔다. 그 후 <인간,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에 있다가 어디로 가는가>(1990),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니…>(1992), <섭리-갈망, 역경, 체념, 생의 의미 그리고 조화>(1993), <섭리-아름다운 그 님>(1995), <섭리-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려 함이라>(1997), <순례자>(2000) 등의 제목을 내건 작품전과 퍼포먼스는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인사아트센터에서의 개인전 <환경을 위한 모뉴멘탈가든>(2002)에서도 성전을 나타내는 돌기둥과 예수상 이미지를 중심으로 설정함으로써 작가의 작품은 기독교의 ‘말씀’ 위에 구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미술이론가 김재권은 이러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복합채널을 통한 소통의 극대화’라는 제목으로 정리하면서 실험의 연속선상에서 자기성찰과 변신의 과정을 시대별로 정리해 놓았는데 결국 그의 다중채널의 향하는 곳은 ‘하나님의 세계’로 규정하고 있다. 이외에도 심영철의 예술에 관련한 논객들의 글들을 보면 그 요지는 작품의 목적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종교적인 메시지를 송출하는 과정에 두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작가가 이러한 종교적 주제를 차용하게 된 근간은 예술이란 ‘정신을 드러내는 활동’이라는 작가 자신의 예술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외적인 요소로서 일가의 영향, 즉 목사로서 사목활동을 하는 친언니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25년의 자취 : 경향별 분류


앞서 말했듯이 심영철의 작업은 예술의 종말 이후의 현대미술에 나타나는 다원주의적 속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작품에 적용되는 내용과 형식을 특정한 하나의 경향으로 분류하기 어렵다. 하지만 1983년 첫 개인전을 개최한 이래 20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그가 생산해낸 많은 수의 작품과 자료들은 남아 있고 그것을 세부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몇 개의 단위를 만들 필요가 있으며 그 방법은 작품의 연대기적 나열이 아닌 경향별로 나누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주제별로는 빗의 조형, 메시지, 전자정원, 모뉴멘탈가든, 환상공간 등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표현방식을 상호 연계해 다시 묶어 보면 내용은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1. 빗의 조형(From the Comb) - 조소(Sculpture)

2. 메시지(Message of God) - 설치미술(Installation Art)

3. 전자정원(Electronic Garden) - 테크놀로지 미술(Technology Art)

4. 모뉴멘탈가든(Monumental Garden) - 공공미술(Public Art)

5. 환상공간(Cyber Space) - 릴리프(Relief)

6. 퍼포먼스 & 비디오(Performance & Video Art)


우선 전통적인 조소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빗의 조형>은 신체를 단장하기 위한 일상적 소품이자 특히 여성들에 있어 필수품인 빗에 대한 조형적 성찰의 결과물로서 조각가로서 심영철의 뛰어난 조형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마치 원시부족의 토템처럼 보이기도 하는 빗의 조형에 작가는 ‘빗의 단계적 표상’이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다양한 변주에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대학원 재학 당시 지도교수였던 정관모는 첫 번째 개인전의 서문에서 “빗이 지닌 본질적인 특성의 형태감을 관념화한 후 그것을 조형의 기본형으로 삼았고 그 기본형을 극대화시키거나 변형시킴으로써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찾으려 했다”고 적으며 한편으로는 민족유품을 소재화한 측면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실 빗의 조형에서 드러나는 빗살의 반복율과 강렬한 구성미를 발생시키는 형상은 작가의 작업 동기를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노트에 “특히 하루가 기우는 일몰쯤이면 빗살 하나하나에 드리워지는 음영과 그 속에 숨은 일체의 언어가 나를 정밀한 평온으로 데려가던 일을 잊지 못한다”라고 적고 있다.

유학 후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종교적 내용의 작업은 그의 작품세계가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에 <메시지>라는 제목을 붙이는 한편 표현방식도 기존의 조각에서 설치적 경향으로 점차 이동되고 있다. 당시 심영철이 밝혀내려는 신의 메시지는 대체적으로 구원의 빛을 머금은 창으로 표상된다. 그 창문은 내면을 향해 열려있는 것처럼 처리되어 상처받은 영혼이나 수난과 고통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목재 패널로 제작된 창문의 표면에 채찍의 흔적처럼 각인된 조각도의 자국은 목재의 물성을 상처 이미지로 연결시키는 데 기여하고 창문의 두께를 관통해 공간을 점유하는 십자가의 내러티브를 강화시키고 있다. 점차 이러한 창문 이미지는 홀로그램을 이용한 3차원의 영상 이미지로 확대되면서 빛의 효과가 강조되고 삶과 구원의 상징적 메시지를 제시하게 된다. 한편 <메시지> 시리즈의 설치작업은 성경책 1500권을 피라미드 형상으로 쌓아놓거나 네온과 더불어 펼쳐 놓은 작업에서 절정을 이루며, 이와 더불어 탱자나무의 가시줄기나 철망으로 제작된 가시면류관 또는 군상을 나타내는 손의 존재로 연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메시지의 시각적 표상 작업은 내러티브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종교와 예술의 접목을 시도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작가의 이미지 형성에 기여하였다.

<전자정원> 시리즈는 종교적 메시지를 테크놀로지와 연계시킴으로서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작업으로 보인다. 현대미술의 문맥에서 볼 때 그것은 동시대의 다양한 조형기법과 매체들을 망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주제가 지니는 서술적 구조에 함몰되지 않고 도상적인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영역을 세우는 계기가 되고 있다. 1990년의 제3회 개인전에 즈음하여 미술평론가 이일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심영철의 작업에서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종교적 메시지와 그것을 자신의 조형체계에 따라 형상화하는 방법론 사이의 갈등’이었다면 1993년부터 시작된 <전자정원>에서는 ‘단순한 성경풀이’에서 벗어나 메시지의 형상화를 통한 모든 방법과 형식 그리고 재료를 동원하여 자신의 조형어법을 현대미술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스스로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대전 엑스포 <테크노 아트전>에 출품된 그의 <전자정원>은 “수십 개의 나무기둥을 공간에 설치하고 여기에 터치스크린에 의해 꽃이 피는 모니터, 움직이는 원통형 홀로그램, 꽃 모양으로 번득이는 네온, 현란한 빛이 파동치는 광섬유 등을 결합시킴으로써 자연과 기술이 통합된 작업이었다.”(김재권) 10여 년간 지속되면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전자정원>은 인공적 파라다이스와 현대과학의 불안한 광기를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모뉴멘탈가든>은 가변적인 설치미술의 한계와 공공조형물의 제작에 대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면서 형성된 경향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전자기기와 설치미술이 지닌 시공간 경영의 한계는 조각가에게 환경조형물이 지닌 기념비적 속성에 시선을 돌리게 했을 것이다. 이 시리즈 초기의 작업에서는 <전자정원> 연작처럼 다양한 매체와 기법들이 망라되고 주제 역시 종교적 메시지를 담은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점차 자신의 삶과 주변적 욕망의 세계를 드러내는 형식의 작업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은 신전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석조기둥과 그것의 변주로 나타나기 시작한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버섯이 다. 특히 심영철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게 될 버섯 이미지는 특수한 지형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몰아가는 원리가 된다. 이제 그의 작업은 종교적 교리나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거리를 확보하게 되며 욕망의 예술적 전이(轉移)를 통해 오히려 종교적 메시지를 삶과 연계한 보다 적극적인 신앙관을 갖게 된다.

릴리프 연작도 환경적 요인과 공공미술의 일환으로 제작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저부조에서 고부조에 이르는 릴리프는 주로 실내외의 벽면에 장식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업은 작가가 애착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경향으로써 소형 패널작업을 조합시킨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릴리프 작업은 <빗의 조형>에서 언급된 작가의 조형적 능력과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단서가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퍼포먼스와 비디오 작업은 심영철의 다의적 표현방법의 극단을 보여주는 사례들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 우선 퍼포먼스의 주제는 종교적 내용과 역사적 사건을 다룬 것들인데, 가령 3·1절을 계기로 명성황후의 복장을 하고 오사카 거리를 배회하는 내용이나 2000년 죽산 인사동 거리에서 개최한 국제행위미술제에서 선보인 <순례자>를 들 수 있다. 주제의식이 강조가 되는 작업의 특성상 퍼포먼스의 특성은 앞서 언급한 내러티브 미술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비디오 작업 역시 설치작업을 위한 보조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메시지의 의미


이상과 같이 심영철의 작품세계를 경향별로 분류하면서 필자는 작가의 작업이 종교적 개념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비평에 대해서 좀더 신중한 접근의 필요성을 느낀다. 우선 그의 작품이 기독교의 ‘말씀’을 표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교회가 규정하는 신학적 가치나 본질적 윤리관 또는 불변하는 아우라가 좀처럼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가 대면하는 세계는 보편적인 개념으로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비롯하여 사랑과 갈등 그리고 갈망과 역경, 나아가 에로티시즘과 욕망 등의 가변적 가치들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에서 심영철의 예술을 교조적인 신앙의 원리로 진단하는 태도는 작품세계의 해석에 왜곡과 한계를 불러일으키게 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실천적 활동을 신앙의 근본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의 종교성이란 본질적으로 규범과 윤리의 체계이며 완성된 텍스트(성서)의 범주에서 해석 혹은 해설의 자유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종교와 삶과 예술이라는 활동의 공통점뿐만 아니라 차별성에 대해 명백하게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시오니즘(Zionism)의 폐쇄적 굴레에서 벗어나 종교가 지닌 보편적 가치로서 삶의 다양성과 연계해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점을 인정한다면 작가의 작품에 흐르는 사랑, 방황, 고난, 순종, 배신, 열정, 타락 등으로 엮어진 다양한 담론들이 종교적 규범과 절대성의 차원 아래 숨겨진 현세적 삶의 현상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자는 심영철의 예술세계에서 기독교의 ‘말씀’과 현실적인 욕망 사이를 오가는 ‘분열된 주체’ 혹은 ‘이중자아’의 속성을 지닌 현대인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차라리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 대상으로서 신에 대한 부정의 욕망이며 진선미(眞善美) 위에 구축된 진리가 위악추(僞惡醜)와 교차되는 접점에서 찾아오는 고독과 갈등의 모습이다. 이러한 감정은 결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부정이나 상실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종교라는 현실 속에 던져진 자기존재를 규정하기 위한 저항이자 그것은 작가의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라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담과 이브의 반역처럼 작가는 신의 영역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이중적 자아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갈등적 심리는 그의 경우 예술작품의 창조행위를 통해 견제되고 이러한 이유로 그의 삶은 건강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주체의 해체를 통해 중심주의에 반발하고 본능과 에로티시즘을 부활시키려 했던 자크 라캉(Jacques Lacan)에 비추어 보면 그의 예술에서 발견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타자화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전제가 가능하다면 자유의지를 확보하고 생의 영역을 넓히려는 현대미술의 가능성에 동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 생산자와 대중간의 소통의 코드는 마련된 셈이다.

심영철이 전개해온 그간의 작업 중 새 밀레니엄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종교성과 예술성 사이에 설정된 공통분모와 차별성을 함께 진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에서 현재까지 6년간은 작가에게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시도한 시기였지만 한편으로 전환기의 분위기 속에서 지난 20년간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자신의 작업에 대한 종합적 성찰을 시도한 6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작업들에는 이전에 설정한 화두가 여전히 흐르는 가운데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정착하려는 시도가 함께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이른바 <모뉴멘탈가든>이라는 이름으로 종합되는 개념들로서 단편적으로는 이중적 판타지아의 세계뿐만 아니라 자연, 생태, 테크놀로지, 토탈환경 등과 연계되어 있다. 이러한 화두의 중심에는 전자시대를 살아가며 개인으로서 겪게 되는 환경적 요인과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다양한 경험들 그리고 가치관들이 녹아 흐르고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작가가 사용하는 장르가 다양하게 나타나며, 매체로서 돌과 나무, 흙, 모래, 자갈, 소금, 물, 불에서 유리, 철, 합성수지, 네온, 광섬유, 홀로그램, 인조피부 등이 사용되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장르와 매체의 통합을 통해 궁극적으로 작가가 찾고자 하는 것은 토탈환경 혹은 전자시대의 메시아이며 이 구원자는 다름 아닌 예술적 표현과 해석의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어떤 실체이다.



이중적 판타지아 : 성(性)과 성(聖)


심영철의 종교적 화두를 담은 예술은 종합적으로 이중적 판타지아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교조주의적 종교원리와 논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이며 현세적 삶과 예술 사이를 넘나들며 형성된 어떤 세계라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성(性)과 성(聖)이 이중환상이라는 개념의 심영철의 예술을 진단하기 위한 하나의 새로운 키워드로 제시될 수 있다. 사실 이중환상의 개념은 다원주의 혹은 포스트모던의 비평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1980년대 이후 국내의 의욕적 예술가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루며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으며 웬만한 삶의 형태와 특수한 캐릭터의 소유자가 아니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예술은 치열한 삶의 반영’이듯이 작가가 내세우는 화두와 그것들 사이에 충돌하는 개념들 그리고 그 충돌현상을 가시적 형상물로 표상하는 일은 방황과 도전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삶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실천의지와 능력이 뒤따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는 바로 심영철은 개성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다. 대학시절 그를 아끼던 지인들로부터 의욕과 열정으로 채워진 여성이라는 평가받았으며 열정적인 성품은 예술의 영역에 있어 곧 끼로 나타나 다양한 매체와 양식의 영역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변혁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탈규범을 먹고사는 예술과는 달리 그와 가족들이 속해있던 기독교의 윤리관과 규범은 예술에 대한 그의 입장을 역설적으로 자극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내세의 삶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교리가 현실적 삶을 완성시키는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듯 두 개의 다른 영역의 대면은 결국 두 개의 다른 개념에 대한 심층적 탐구를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심영철의 작품세계에 나타나는 이중적 판타지아를 구성하는 성과 성의 의미는 상보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심영철의 예술적 화두로서 제시되는 종교적 성(聖)의 세계는 과학적 기술의 산물인 네온, 광섬유, 홀로그램, 비디오, 등의 매체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으로 되어 있다. <전자정원> 시리즈에서 보듯 이성과 합리의 세계가 낳은 뉴미디어에 의존하여 드러나는 종교성은 그래서 전래적 신앙의 범주를 넘어선 과학적 분위기로 축성되어 있다. 테크놀로지를 조형적 원리로 삼은 동영상 설치작업은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 세계와 합리적인 영역을 결합하는 차원으로 연결되면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감각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의 종교는 역설적으로 현대사회에 새로운 가치관을 제공해 주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예술 안에서 과학과 종교의 만남은 어떠한 의미를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일까? 예술과 과학과 종교라는 세 요소의 결합은 심영철의 예술에 개성을 담보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일까? 심영철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찾는 메시아는 결국 전자시대의 이상 혹은 미학적 사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심영철의 작품에 나타나는 생리학적 개념으로서 성(性)이 발생되는 지점은 바로 종교적 성스러움과 과학기술이 현실적 욕망과 마주치는 접점이다. 그의 작품에는 심리학자 자크 라캉의 주장처럼 욕망하는 인간의 본능이 증폭되고 있는 현세의 언덕에서 에덴을 꿈꾸는 인간들의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전자정원>을 장식하고 있는 성의 세계는 그리스도의 영광인 가시 면류관이나 십자가 등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성적 도상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령 <아름다운 그 님>에서 엿보이는 버섯의 형상은 암시적인 에로티시즘을 나타내고 있으며 <노아의 방주>로 표현된 집단적 군상으로서 표현된 남근의 이미지는 과히 충격적이다. 미술평론가 최태만은 개인전 서문에서 버섯의 비틀린 자태가 상징하는 것은 “생의 환희와 열락과 욕망”이자 나아가 “생명과 창조 그리고 풍요의 신비”를 상징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면 심영철이 작품에 나타내는 성적 도상과 관련한 개인적 관심과 열망은 단순한 성교의 차원을 넘어 인류학적, 신화적, 심리적, 정신분석학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사실 화려하고 다양한 유기적 형상을 지녔으며 관능과 욕망의 상징물로서 제시되는 버섯이 홀로그램과 네온이 발하는 화려한 빛과 어우러질 때 거기에서 발생하는 세계는 성과 성이 결합된 상징의 영역이다. 이러한 에로스적 성의 담론은 작가가 즐겨 다루는 <아담과 이브>의 영상작업에서 종종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성과 에로스적 성의 이중적 표현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통합되며 그 시각적 표현의 구조 속에서 피어나는 의미들은 신화와 종교에서 시작되어 전자시대의 현란한 빛과 어우러지는 가운데 자신의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조형언어로 결정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에필로그


우리가 불가사의한 자연현상을 대할 때 느껴지는 신비로움을 ‘숭고’라 부르듯이 테크놀로지가 발견해 내는 자연의 신비는 종교적인 차원의 숭고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을 종종 경험할 수 있다. 전자 천체경이 발견해내는 우주 공간의 무한적 세계는 현대인들에게 자연현상에 대한 신비와 숭고를 둘러싼 베일을 벗겨내는 감각의 날을 치켜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 미디어의 위력을 보더라도 우리는 과학적 발견이 ‘두려움을 동반한 쾌’로서 무한한 숭고의 감각과 항상 공존한다는 점을 체험적으로 느끼게 하며 궁극적으로 세계의 질서는 종교적 신비의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한다. 결국 첨단과학은 신비의 껍질을 벗겨내는 도구이지만 그 껍질은 벗겨낼수록 그 안에 숨겨진 자연의 신비는 증폭되고 결국은 탄생과 소멸을 주관하는 존재로서 ‘제일 원인자(第一 原因者)’의 세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심영철의 <전자정원> 시리즈나, 최근 새로 선보인 <모뉴멘탈가든> 작업에서 관객이 경험하는 느낌을 ‘숭고’의 감정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터치스크린에 의해 꽃이 피는 모니터, 움직이는 원통형 홀로그램, 꽃 모양의 번득이는 네온, 현란한 빛이 파동치는 광섬유”로 제작된 그의 작업은 두려움을 동반한 쾌의 차원이 아니라 유희적이고 장식적인 즐거움을 제공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가 표상해 내는 자연과 기술의 통합적 시도가 점차 종교적 개념에 의해 축성될 때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미학적 의미는 우리를 숭고의 영역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모뉴멘탈가든>은 자신의 삶을 가꾸는 하나의 정원이다. 그 정원에 머무는 메시아는 전자시대를 사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할 주체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에 대한 갈구가 증폭될수록 현세적 욕망은 고개를 들고, 욕망이 증폭될수록 메시아에 대한 갈구는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마련이다. 분명한 것은 분열적 경향의 작품들의 생산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지탱할 수 있었던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같은 현대미술사의 주역들처럼 심영철의 예술은 첨예한 두개의 상극을 조율하는 메시아의 정원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전자시대의 에덴동산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곳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환희와 고통 그리고 숭고와 욕망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하고 있다.  



<인터액티브와 교감이 이루는 미의 향연>


설치작가 심영철은 전천후 공간의 창조자다.  어떤 공간이 주어지든 다양한 전략과 매체, 자신만의 독보적인 해석과 연출로 근성과 개성이 넘치는 놀라운 축제의 공간들을 창출해내는 작가다.  작가는 20년 넘게 풍부하고도 섬세하며, 때로는 쇼킹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일구어왔으며, 언제나 변화무쌍한 새로운 모티브와 방법으로 나타나곤 한다.  타고난 ‘끼’ 때문인지 그의 전시는 언제나 시끌벅적한 한마당 축제가 된다.  주어진 중성적 공간, 그리고 그것을 놀이와 교감의 마당으로 꾸미는 작가의 감각과 발화, 관객들의 참여, 이 모두가 유기적으로 조합되고 구성됨으로써 역동적인 미의 향연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오감(五感)이 즐거워지는, 나아가 제육감(第六感)까지도 가동되는 미의 한마당 잔치에는 작가의 공간적 미술이 자리하고 있다.


이번 석주미술상 수상기념전 역시 또 한 번의 참신한 볼거리와 한마당 잔치로 준비되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입체와 평면이 전체 전시 공간을 수놓는 설치를 근간으로 오브제와 빛, 강렬하다 못해 현란하기까지 한 퍼포먼스 및 관객의 능동적인 참여 등이 함께 하는 전시이다.  작가의 매체나 오브제들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새로운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다.  트럭 한 대 분의 성경책 설치와 그것들을 배포하는 퍼포먼스, 전자정원을 통한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연출, 환상과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홀로그램, 각종 미디어 영상, 전통 공예와 조각, 그림...... 그야말로 미술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망라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작가는 공간에 대한 탐구와 매체에 대한 탐구를 부단히 해 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작가의 작업이 아무 것이나 혼재된 부류의 것은 아니다.  작가의 작업은 항상 자연, 그리고 그 너머의 초월자와 교감하고자 하는 영적 구도의 자세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인간으로서 거부하기 어려운 본능과 자유로운 꿈꾸기 등이 혼재된 속에 승화와 정화를 언제나 결론으로 설정하고 있다.  때로는 남근을 너무도 닮은 버섯 형태의 발칙한(?) 연축이 오히려 작가의 진지함과 솔직함을 보여주곤 한다.  이렇듯 발칙해 보이는 형상들이 나타나 혼란을 줄 수도 있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섭리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며, 아울러 성과 속의 갈등과 조화가 결국은 우리 인간의 숙명적인 것임을 성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혼자만이 절대자 앞에서 고고한 체 하는 고담준론이 아니라 내면의 진지한 고뇌를 반영한 자기 성찰이자 고백이어서 호소력을 가진다.


언제나 주어진 고간은 작가에게 중요하다.  공간을 해석하고 연축하는 것이 작가로서 가장 중요한 과제라 믿기 때문이다.  이번 작업은 모두 주어진 4개의 층을 통해 하늘, 땅, 물이라는 모티브를 설정하고 있다.  1층의 경우는 ‘물’로서 수생식물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단순한 서술로 넘길 것은 아니다.  우리 자연계 생명체의 근원으로서 한 송이의 꽃에도 또 다른 무수한 생명의 조직과 원형들이 모자이크처럼 조직화되어 비로소 하나의 군집적 생명체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전 기둥과도 같은 좌대 위에 화사하게 피어 있는 꽃은 유리, 옥, 자수정 등이 모자이크처럼 박혀 있어 마치 묵시록에서 기술되고 있는 천국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음을 읽을 수 있다. 4층에서는 하늘을 상징하는 거대한 천장 설치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홀로그램과 미디어의 연출에 의해 경건하고도 몽환적인 대기가 연축된다.  또한 2, 3층에서는 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벽에 강렬하고도 다중적인 일루전과 리얼리티가 혼재됨으로써 피조물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 생성과 존재 및 운행의 권능자에게 무한한 경의와 경배를 보내는 메시지도 복합적으로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작가의 작업은 복합적이고 다의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어느 것 하나도 한 가지 코드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없다.  일찍이 어떤 비평가가 탈모던의 담론을 기술하면서 대표작가로 거론했던 내용 그대로이다.  입체와 평면,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이질적 양식이나 매체 및 재료의 조합, 신성과 세속적 쾌, 자연 생태와 인간 등의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조합되며 부단히 운동함으로써 거대한 우주의 본질을 상징하고도 있다.  다분히 혼돈이 세계상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논리적 귀결은 대체로 승화와 치유로 모아진다.  말초적이고 관능적인 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두가 선(좋음)을 향한 승화의 과정을 거칠 때 가치를 발하며, 내면의 치유가 가능해질 것으로 믿는 것이다.


한마당 축제에서의 오감적 유희와 즐거움을 통해 미의 이상은 표면적으로가 아닌 보다 은유적이고 비밀스런 방식으로 구현된다.  그런 가운데 무언가 여운을 남기며 찰나적으로라도 생각하게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작가가 붙잡고자 하는 궁극이다.  드넓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환영과 환각의 축제에 참여한 관객의 호기심과 미세한 반응조차도 작품의 중요한 요소를 이류게 된다는 점, 바로 그것이 작가가 고집하는 미학의 요체일 것이다.


이재언(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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