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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철의 테크놀로지 미술, <전자정원>에서의 신앙 고백 - 유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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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40회 작성일 22-06-05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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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철의 테크놀로지 미술, <전자정원>에서의 신앙 고백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과학적 테크놀로지를 도입한 현대 미술은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움직이는 조각이나 네온 작업, 비디오 아트, 홀로그램 등 테크놀로지 미술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비디오 미술로 우리에게 친숙한 백남준씨의 “어느날 미술가들은 붓이나 물감, 대리석 대신 TV모니터나 축전기, 반도체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느낌이다. 물론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화나 조각의 전통적 표현 방법과 기존의 미 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으나 현대 과학 기술을 이용한 미술의 변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테크놀로지 미술가로 심영철은 이 같은 새로운 변화와 요구에 누구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에 몰두하는 작가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구성적 형태의 조각가로 시작하여 지금은 다양한 과학 기술을 작품에 도입하는 실험적 설치 미술가로 변신하였다.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한 그의 전자정원(電子庭園)은 키네틱 미술의 종합적인 장(場)으로 우리에게 또 다른 미(美)의 개념과 다양한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하여 현대 미술의 새로운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마치 이것은 “이제 미술은 과학과 결혼하였다.”라는 초기 키네틱 미술가들의 선언적 의미가 실현된 것으로 그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이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금번 또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는 심영철의 테크놀로지 작품, <전자정원>을 산책하기 전에 본고에서는 먼저 일반 감상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테크놀로지 미술의 특성을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테크놀로지 미술은 1960년대 활발하였던 서구 키네틱 미술의 연장선상에 있다. 키네틱 미술가들은 과학 시대에 맞는 현대 미술의 이론과 조형적 탐구로 정적인 미술이 아닌 동적인 시각 미술을 찾아 나선다. 하나의 예로 이들은 정지된 인체 조각보다 움직이는 기계 조각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과거처럼 풍경과 인물 또는 추상의 순수한 조형적 표현에 나타난 미(美)보다 움직임이라는 색다른 조형 요소를 삽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들의 작품은 미술관에 얌전히 걸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가 활동하고 살아 숨 쉬는 곳에 설치되어 대중과 함께 호흡을 같이 한다는 생각을 갖고 환경 미술로 발전시킨다.

 다양한 표현의 테크놀로지 미술은 다음과 같이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자연의 힘에 의한 움직이는 조직으로 순간적 형태의 변화를 강조하는 유형이다. 이것은 바람이나 풍력, 물의 흐름, 자석 등의 물리적 영향을 이용한다.

 모빌이라는 움직이는 조각으로 유명한 알렉산더 칼더를 비롯하여 분수대의 물 위에 움직이는 구체(球體)를 만든 풀부리, 증력과 바람에 의한 움직이는 추상 형태의 조각을 만든 죠지 릭키가 있으며, 타키스는 자석을 이용한 움직이는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이들의 조각은 미묘한 움직임, 그 자체의 변화로 동적인 아름다움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감상하게 한다. 둘째는 동력 장치에 의한 기계적 움직임을 추구하는 조각과 네온이나 형광등의 인공적 빛을 조형화 하는 유형이다. 때로 이것은 관객의 조직에 의한 가변적 형태를 유도하기도 한다. 전기에 의한 빛과 기계적 움직임은 1930년 모흘리 나기의 <광선 기계>가 처음 만들어지면서 1960년대 팅켈리의 모터에 의한 기계적 움직임의 조각 탄생으로 키네틱 미술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이 같은 기계 조작은 동력을 이용, 다이나믹한 움직임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끌며 작품을 만져보게 하거나 스위치를 만들어 관객이 조작하게 한다. 이는 기존의 수동적 감상 자세와 달리 능동적 감상으로 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면서 미의 개념이 확장된다. 셋째로 테크놀로지 미술의 유형은 첨단 매체와 기술의 복합적 형태로 나타난다. 대중 매체가 된 TV나 비디오를 비롯하여 레이저, 홀로그램, 감지 장치(센서)에 의한 조형 작품 등이 제작된다. 폭넓은 실험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도출하는 전자(電子) 이용의 작품은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이론에서 나온다. 미술에 인공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가 도입되어 새로운 예술로 영역 확장이 이루어졌으며, 이 분야의 대표적 작가로 1950년대부터 활동하였던 니콜라스 쉐페르와 짜이 웬잉, 그리고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이 있다.

 이상과 같이 ‘움직임’을 새로운 조형 요소로 생각하고 미술에 테크놀로지의 도입을 과감히 실험하는 미술가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과학 문명 시대의 증인으로 등장하였다. 공간에서 움직이는 시각적, 조형적 변화를 탐구하는 이들의 작품은 과학적 연구와 달리 여러가지 예술적 감흥으로 전에 느끼지 못하였던 새로운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있다. 감상자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형태와 빛의 변화, 진동과 음향 등에 빠지며 종합적 성격의 예술인 테크놀로지 미술을 만나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테크놀로지 미술가들은 더욱 발전된 전자식(電子式) 시스템으로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붓 대신 키보드와 마우스로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이처럼 전자공학을 이용한 테크놀로지 미술가들은 과학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미술과 감상자 사이를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으로 만들고 일반 대중에게 새로운 미적 발견과 창조의 기쁨을 체험하게 한다.

 심영철의 작업은 이와 같은 시각 현상 탐구와 테크놀로지 미술의 역사적 바탕 위에 이루어지며 그의 미적 특성 역시 키네틱 미술가들이 추구하였던 근본 개념과 공통점을 갖는다. 여기서 그의 작업 태도는 과학적 기술과 조형성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종합적 미술의 열린 장(場)으로 성격을 분명히 한다. 금번 전시된 <전자정원>과 기타 작품에서 보여준 재료만 보더라고 가공되지 않은 나무 기둥과 채색 물감, TV모니터, 네온, 광섬유, 홀로그램+바위, 컴퓨터, 관객에 의해 움직이는 터치스크린 등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그는 과학과 예술,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이 장소를 새롭게 엮어 나간다. 이 같은 실험적 재료와 기술의 등장으로 자유분방한 그의 조형적 표현 세계는 감상자를 살아 움직이는 신비로운 시각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금번에 제작된 바위에 홀로그램 작업이나 시계추의 홀로그램, 릴리프(Relief) 홀로그램 작업은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 주목 받고 있으며, 그의 차가운 표현의 인공적인 것과 뜨거운 표현의 종교적 주제와 결합은 실험적 기술 못지 않은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그가 의도한 관객의 참여는 관객을 방관자가 아닌 예술가로 대접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 관객은 이제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하여 작가와 함께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테크놀로지 미술에 친밀감을 느낀다.

 금번 전시에 주로 소개되는 움직이는 조각과 컴퓨터그래픽 영상, 구체적 형상이 나타나는 홀로그램이나 기하학적 추상 형태의 릴리프 작업, 분수대 등은 작가의 말처럼 ‘자연과 테크놀로지의 직접적인 결합을 통한 인간의 정서를 환경적으로 통합’이다. 자연의 이미지가 실제 나무 토막이나 흙, 물, 철을 통하여 고도의 과학적 기술과 조형이 접목되면서 열려진 공간이 주목된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종합적 테크놀로지 미술로 기계 주의 범람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결합을 꿈꾸게 하며 현실적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우리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한다.

 심영철의 <전자정원>주제는 종교적 믿음 속에서 신(神)과 자연의 섭리(攝理)이며 인간의 갈망과 체념, 생의 의미를 그리고자 한다. <전자정원>에 나타난 [신의 섭리]는 ‘최후의 만찬’과 그리스도의 영광인 ‘왕관’이나 ‘십자가’ 등으로 나타나며 [자연의 섭리]는 원시 시대의 화석과 같은 ‘악어’ 모습이 등장한다.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 그의 주제는 결코 멈추지 않는 신의 은혜와 믿음 그리고 소망을 담고 우리들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시킨다.

 1970년대 이후 테크놀로지 미술은 기술에 치우친 시각적 작업으로 소강상태에 빠진다. 역시 미술은 전통적 미의식을 바탕으로 조형적 표현에 중점을 두어야 하지 않나 하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심영철의 경우, 이러한 문제점을 읽고 테크놀로지 미술이 과학처럼 발전이나 발명이 아니라 혼이 담긴 예술로 신(神)과 인간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발전시킨다. 과학적 연구와 기술적 발명의 한계성을 지적한 테크놀로지 미술가들의 교훈적 충고를 수용하면서 신과 인간의 ‘섭리’를 표현하고자 한 동시에 그는 테크놀로지 미술에서 유희성을 첨가하여 관객을 예술가와 동반자적인 역할로 끌어 들이면서 현대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전자정원>과 함께 전시된 부조 작품이나 움직이는 분수대 작품 속에 들어간 관객은 변화하고 있는 형태의 시각적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공간의 탄생을 느끼게 된다. 한편 그의 조형적 표현은 자연의 근원적 형태인 원이나 삼각형, 사각형 구성의 순수 기하학적 추상과 종교적 감동을 직접적으로 전해주는 홀로그램과 결합시켜 적극적 참여를 도모한다. 여기에 나타난 ‘최후의 만찬’ 홀로그램은 미술 감상 이상의 의미인 예배당으로까지 비치고 있다.

 끝으로 심영철의 테크놀로지 미술과 연관 시켜 볼 수 있는 것은 이 시대의 성격과 미래 지향적인 모습의 미술가의 자세이다. 물론 앞으로의 미술에 관하여 어떻게 전개 될 것이라고 어느 누구도 확정적인 답안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학 문명의 발달과 기술 시대에 있어서 미술과 과학의 만남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은 증명되고 있다. 이 시대의 미술가들은 최후의 모더니스트로 고립된 탐미적 자세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아 나서는 자유가 필요하다. 이것이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으로 우리의 정신 세계와 환경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새로운 환경과 정신적 삶의 조화로운 예술적 표현을 추구하는 과학자 같은 심영철의 작가 의지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는 마치 미지의 우주를 향한 탐험가처럼 모험심에 가득 찬 예술가처럼 보인다. 이러한 전시를 통해 우리는 그의 추진력과 결과에서 테크놀로지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고 작가의 성실한 탐구 자세에 커다란 기대를 갖게 된다. 따라서 미술과 테크놀로지의 조화로운 결합에 지속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그에게서 우리는 현대 미술의 밝은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1993.11. 유재길 (미술평론가)


선화랑 - 김영철 섭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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