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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그릇 - 서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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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29회 작성일 22-06-14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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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그릇


심영철의 작품과 관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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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조각은 여러모로 전통조각과 구분된다. 커다란 차이점의 하나로 다양한 미디어의 활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철조, 목조, 석조 따위는 진부해진 지 오래되었고, 요즘에는 일상의 오브제뿐만 아니라 각종 첨단매체가 고개를 내민다. 재료 개념에서 볼 때 전통조각과의 갈등이 이만치 고조된 적도 없었을 것이다.

 

다른 조각가들처럼 심영철도 각종 미디어를 동원하는 작가 중 한명이다. 철사, 나무, 시계, 성경책, 유리, 자갈, 암석, 잔디, 화분, 선인장을 비롯하여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재료의 폭이 꽤 넓은 편이다. 종래의 경질재료에서 오브제, 그리고 장치개념까지 겸비된 재료가 구사되는 것을 보게 된다.

 

1993선화랑에서 열린 다섯번째 개인전의 출품작 전자정원은 폭 넓은 재료 확장을 보여준 경우였다. 움직이는 조각과 컴퓨터그래픽 영상, 홀로그램이나 기하학적 추상형태의 릴리프 작업, 분수대 등은 고도의 과학적 기술과 조형이 어우러지면서 조각의 근래 추이를 단적으로 나타냈다. 그뿐 아니라 작가는 관객에 의해 작동되는 터치스크린, 오묘한 빛 효과를 발산하는 광섬유를 사용하면서 과감한 재료실험 및 신기술 도입으로 새로운 시각영토를 개척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실제로 작가는 온갖 미디어를 사용하여 자연세계를 인공세계로, 정확히는 '하이 테크놀로지의 저장고'로 바꾸어놓았다. 전기회로로 수놓은 숲, 나뭇가지에 매달린 수많은 모니터들, 그리고 주변의 화려한 네온 빛 흡사 SF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만큼 테크놀로지의 장착·활용이 두드러졌다.

 

감상자와 작가가 대화를 나누게 하는 쌍방향 담론체계 구성이나 과학기술을 전격적으로 미술에 끌어들이는 시도는 지금은 어느 정도 보편적인 작업경향이 되어버렸으나 조각의 전통적 개념에서 바라본다면 획기적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미술과 기계공학의 접목'이 바야흐로 시대적 조류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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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은 이제 그 정체마저 잃은 것 같고 또 실제로 조각이라는 개념자체가 해체된 것 같은 인상을 심어준다. 심영철의 경우는 어떤가? 필자가 보기에 그는 단순한 형식실험, 또는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차원에서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기계주의의 범람 속에 파묻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기보다는 영혼이 담긴 목소리를 진지하게 끌어내고자 한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형식적 측면에서는 첨단의 길을 걷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다분히 '복고적인 성향을 내보인다. 여기서 복고적 성향이란 일찍이 종료되었던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미술과 종교의 결합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 '복고적 성향' 이란 말은 탐탁치 않는 표현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의 경과와 무관하게 절대자는 엄연히 존재하듯이 인간이 생산하는 미술도 절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떤 흔들림도 가질 수 없다는 입장에서 보면 '복고적 성향이란 '항구적 성향'으로 고쳐 쓸 필요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심영철의 작업은 '축복''은혜'의 메시지로 충만하다. 이 땅에 살면서 체험하는 환희의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기분이다. “천국이 우리의 고향이다"(니키포로스 블렘미디스)는 생각이 깊게 삼투되어 있는 듯한데 물론 그러한 성격은 그의 특유의 종교관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다. 기독교적 신앙이 그를 굳건히 떠받히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을 '성령의 엑스터시'로 이끄는 주된 역할을 한다. 이때 십자가, 성서, 그리고 빛은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매개물로 등장한다.

 

1991예술의전당미술관에서 열린 <젊은 시각 - 내일에의 제안전때 출품된 작품도 그 예의 하나이다. 당시 작가는 15백 권의 성서를 모아 원형으로 층층이 쌓아올린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그리고 상단부에 철사덩굴 속에 빛나는 네온을 통하여 복음의 메시지를 실어내었다. 1994토탈미술관에서 주최하는 토탈미술상수상작가전 때는 TV모니터, 버츄얼 리얼리티, 홀로그램, 음향, 나무, , 돌 등 복합매체를 이용하여 구원에 이르는 경로를 플롯 형식으로 구성한 바 있다. 이때에는 어둠 속에서 방황하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여 진정한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는 과정을 천로역정의 줄거리처럼 고통번만만남믿음축복구원의 단계로 각각 나누어 표현하였다.

 

'연출의 극대화' 라고 할까, 그의 작품에서는 내용 못지 않게 장경(스펙터클)이 종종 강조되곤 한다. 무대세트를 꾸미듯이 그렇게 전시장을 꾸미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조각이란 특정한 이미지를 꾸미는 성형이 아니라 공간 자체를 환경화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인데, 아닌게 아니라 공간을 연출하는 것이 대단히 큰 의미를 차지한다. 그리하여 감상자는 그의 연출수법에 따라 공간을 배회하는 여행객이 되며 이때 작가는 친절한 가이더역을 맡게 되는 셈이다.

 

토탈미술관서 선보인 대작은 그가 얼마나 공간구성의 안배와 그러한 구성과정에 필수적인 연출의 중요성에 큰 관심을 가졌는지를 보여준 실례였다. 나무의 모뉴먼트, 버섯의 뜰, 새장속의 가상현실, TV 모니터 등 각종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별도의 공간이용 장치 사이에 나 있는 자갈 깔린 동선을 걸으면서 감상자는 한편의 연극을 관람하듯이 다양한 시적 체험을 누리게 되는데 이는 공간의 운동감감상자의 반응'을 중시하는 그의 독특한 작품취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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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만 꼽는다면 바로 '빛의 요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빛은 주로 네온이나 일렉트로닉 라이트로 제시된다. 거기서 우리는 실생활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화려하고 명료한 색상을 볼 수 있거니와 색채보다 더 색채감이 나는 리얼리티를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빛의 의미가 물리적 차원에 머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작품에 있어 빛은 진리로 비유될 수 있으리라 본다. 어둠을 열고, 무지를 지의 세계로 바꾸며 참된 세계를 통찰하는 것을 빛의 의미로 보았을 때 빛이 가지는 의미내용은 진리가 거느리는 의미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실제 그러한 빛의 미는 누구나 알 수 있고, 또 알고 있는 사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의미를 몸소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깨닫고 그 속에서 기쁨을 얻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자, 또는 최고로 행복한 자라고 해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곁을 스쳐지나가는 빛을 예민한 촉수로 감지하면서 그 의미를 직접 누리고자 하는 심영철은 그래서 늘 황홀한 상태에 빠져 있고 자신만이 느끼는 그런 기쁨을 주변사람들과 나누고자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빛을 매개로 표상되는 것은 어떤 초월의 경지이다. 그 초월적 세계의 최종 지점에 버티고 서 있는 존재는 아름다움이며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성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신현의 구체적 전달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물론 이 같은 사실은 전혀 새로운 내용의 것은 아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우리는 중세의 비잔틴 미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잔틴 미술의 경우 미술가들은 어떤 형체의 표현에 주력했지만 그들이 목적하였던 것은 형체의 표현 자체가 아니라 그 이면에 가려진 영혼이었다. 그들에게 형체란 단지 영혼의 상징물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현대의 신학자는 "참된 미술가는 영혼을 묘사하지 형체를 묘사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영혼의 궁극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미술가들은 형체를 가장 추상적인 것으로(가능한 한 유기적인 형태로) 환원시켜 탈물질화 시켰다. 심영철의 경우, 빛은 신성이 육화된 형태로서 제시되지만, 정작 그것이 뜻하는 바는 영혼, 즉 비물질의 정신적 세계이다.

 

신성을 표현하는데 있어 기존의 종교적 도상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발상에 있어서는 고전적 명제에 기초하나 그 해석에 있어서는 현대적 수법을 따른다. 복합적인 구성방식에 의해 마련된 설치를 비롯하여, 불꽃과 조명에 의한 라이트 아트, '워터 스크린'에 의한 키네틱 아트, 오디오와 비디오를 결합한 컴퓨터 애니메이션 등 동원할 수 있는 첨단적 방식이 다 동원된 듯하다. 그 외에도 영상과 부조 및 네온 콜라주 등의 일련의 작품을 통해 신성 표현과 함께 조형 영역의 확대라는 또 다른 과제와 대결하는데 이는 종교적 문제 못지 않게 조형적 문제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말해준다.

 

이와 함께 심영철이 여태껏 고민해온 문제의 하나는 '모국어적 조형'의 발견이다. 말하자면 우리 미술의 숙원사업' 이기도 한 우리다운 미술을 전통 가운데서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작가는 80년대에 머리빗을 추상적으로 변형시키는 작품을 발표한 바 있거니와 그 연장선장에서 요즘은 토속적인 소재들을 재구성하여 등장시키고 있다. 전시공간을 성황당처럼 꾸미거나 돌무덤을 쌓아올리거나 나무에 울긋불긋한 네온이나 형광안료를 칠해 무속적 분위기를 물씬 자아낸다. 아울러 하나하나의 돌을 박스형태로 만든 다음 그 안에 장치된 모니터를 통해 컴퓨터그래픽을 보여주거나 실제의 흙을 옮겨와 전시장 바닥을 황토로 깔아 놓는 등 다각도의 표현에 주력한다. 이 경우에도 예외 없이 감상자는 여행객이 되어 전체공간의 이곳저곳을 탐방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가 탐방하는 곳은 '민속보존지역'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오랜 세월 꿋꿋이 이어온 무속적 세계와 직접 마주치게 함으로써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쉬는 민속문화의 숨결을 흠뻑 들이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심영철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혼'의 표현과 그러한 표현을 위해 반드시 거치게 되는 신앙 고백적 태도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나약해질 수밖에 없듯이, 신 앞에서 그는 여지없이 '순한 양'이 되고 만다. 엄청난 존재의 무게에 짓눌려 이내 고개를 숙이고 마는 것이다.

 

올해 열린 여덟번째 작품전에서 심영철은 종래의 섭리시리즈와 같은 맥락에서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아가서)란 부제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때의 '사랑' 이란 흔히 연인간에 오가는 한정적인 '에로스'의 성질보다는 주기만 하는 무한정적인 '아가페'의 성질이 더 강할 것이다. 그러한 '아가페적 사랑'의 주체는 오직 신만이 가능할 것이다. 감히 사람의 눈금으로는 잴 수 없는 깊이감과 너비가 그 속에 깃들어 있음은 자명하다. 따라서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란 말이 가리키는 내용은 신의 은총은 질적으로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을 뿐더러 양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을 내포한다.

 

근래 전시에서 설정된 테마는 대체로 3~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버섯의 뜰', '노아의 방주', '비디오 모니터와 신체적 영상', 그리고 '전자 정원'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노아의 방주'는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통나무배를 테마로 삼은 것으로, 이 세상을 물로 뒤덮은 홍수를 피하여 노아의 가족과 동식물을 태운 배가 출항하는 광경을 담고 있다. 전시장에 옮긴 배에 20개의 버섯을 설치하고 주변에는 네온을 부착하여 탑승한 생명체의 존재를 암시하도록 하였다. 이 작품은 위쪽과 옆쪽에서 각각 조명을 비춰 바닥을 실제로 배가 바다에 뜬 것처럼 처리하고 또한 배 위의 오브제를 선상에서 기웃거리는 사람처럼 그림자로 처리하고 있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위로 솟아오른 버섯모양이다. 그 스무개의 버섯은 제각기 독자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짧막한 것/ 큰 키, 통통한 것/가느다란 것. 건장한 것/여윈 것, 굽은 것/곧은 것 등등. 그러나 이러한 차이만으로는 버섯이 지닌 성격을 설명하기란 부족할 것이다. 버섯에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구조물들의 상호관계'이다.

 

노아의 방주란 종착점 없는 항해를 의미한다. 홍수가 그칠 때까지 그들은 꼼짝없이 배안에 갇혀 물 위를 표류해야 할 운명이다. 따라서 배안의 주인공들은 암담하고 답답한, 경우에 따라서는 산더미처럼 밀려드는 파도에 직면하여 죽음의 엄습을 목전에 둔 절망적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버섯들은 그 주인공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표현하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한 채 서로 이해하며 위로한다. 상대방을 향해 고개를 숙여 조아리고 어떤 것은 몸체를 다른 것에 기대는 포즈를 취한다. 벼랑 끝에 매달린 상황처럼, 인간의 나약한 측면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작가가 나약함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배의 측면에 새겨 넣은 한쌍의 비둘기는 '고통의 종말''희망의 시작'을 암시해준다. 성서의 이야기대로 노아가 하늘이 개이자 비둘기를 날려보냈을 때 그 비둘기가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와 정박할 육지가 생겼음을 알았던 것처럼, 배에 새겨진 비둘기는 질곡에서 벗어나 평온을 되찾게 되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흔히 삶의 우여곡절을 빗대어 말할 때 '인생여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어떤 사람이든 밤처럼 깊은 어둠 속을 거닐 때가 있고 그러다가 낮처럼 밝은 기쁨을 맛볼 때가 있다. 모든 인생에는 절망과 체념, 그리고 환희와 희열이 쌍곡선을 그리며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파란만장한 삶의 경로를 인생여정이란 말로 설명하지 않나 싶다. 그러면 심영철은 자신의 인생여정의 귀착지점을 과연 어디에다 놓고 있을까? 분명코 그에게 있어 인생의 모든 것은 창조주에게 귀속되니 만치 창조주에게 귀속되는 길만이 평온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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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신의 버섯작품에다 아름다운 그 님 (Beautiful one)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때 아름다운 그 님의 대상은 물론 절대자인 창조주를 가리킨다. 따라서 버섯은 그 자체가 생명의 근원으로 묘사된다. 이 땅에 태어나 온전히 자라나게 하고 온갖 혜택을 누리는 피조물은 창조주의 지극한 사랑 때문인 것을 그는 잊지 않는다. 그와 같은 고마움의 표시가 캐스팅 처리된 브론즈, 또는 대리석 조각, 그리고 돌 위에 꽂은 스텐레스 스틸 작품 가운데 스며들어 있다.

 

아름다운 그 님에서는 버섯이 군상으로 등장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장독대를 오브제로 이용한 작품들의 경우, 두세 개의 버섯이 서로 마주보며 정담을 나누는 듯한 정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장독대 위에 핀 버섯은 어떤 측면에서 어색하게 보일 수도 있다. 장독대와 버섯은 전혀 연관이 없거니와 '고상한 자태' 와는 어쩐지 거리가 멀어 보이기 때문이다. 두 이미지가 공유하는 것도 아마도 관심 밖의 하잘것없는 것일 수 있겠다. 장독 항아리의 단조로운 형태도 그렇게 버섯 또한 아무 데서나 자라는 볼품없는 존재로 우리의 인상 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럼에도 두 이미지를 기용하는 데는 특별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신의 사랑이란 우리가 생각하듯이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주어진다거나 특별한 환경 아래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밥 퍼주는 시인'처럼 아니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음지에서 베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버섯이 신의 은총을 상징한다면, 이 작품은 그 은총이 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데라면 어디서나 베풀어질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서성록 (미술평론가)


19968월호 미술세계 작가를 찾아서'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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