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와 카리타스의 조화로운 만남 - 최태만 >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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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와 카리타스의 조화로운 만남 - 최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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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663회 작성일 22-06-14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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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와 카리타스의 조화로운 만남


 현란하게 요동치는 빛의 물결 속에 피어나고 있는 낙원의 식물들, 태초의 혼돈과 그것으로부터 탄생하는 우주에 대한 우의적(寓意的) 알레고리로 가득한 인공동산, 창세기의 신비와 종말론의 암울한 대단원이 뒤섞인 듯한, 격앙된 열정과 가혹하도록 냉정한 자기성찰의 태도가 깃들어 있는, 죽음과 삶의 환희가 교차하는 심영철의 작품은 그 앞에 선 사람들로 하여금 단지 보는 행위를 통해 작품을 수용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우리는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고, 그의 작품은 또한 우리를 그가 설치해 놓은 덫에 갇히도록 유혹한다. 인간의 삶을 암시하는 온갖 상징과 신성이 공존하는 그의 작품은 꿈의 미래인 테크노피아의 영상이 에로티시즘과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빛의 제국’이자 ‘환상의 신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만들어 놓은 가상의 왕국은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로 내려갔던 하계(下界)이자 또한 그의 연인 베아트리체와 함께 보았던 지고천(至高天)이기도 하다.

 그는 전자장치에 의해 조성된 이 작품을 통해 신의 은총과 그에 대응하여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사랑을 노래한다. 그러나 신으로 향한 그의 사랑의 방식은 비잔틴제국 시대에 발흥했던 성상파괴주의자들의 형상에 대한 거부감이나 캘빈의 저 금욕주의와는 사뭇 다르다. 심영철은 이미지에 대한 청교도적인 억압에 저항하며 이미지의 해방을 통해, 찬란하게 빛을 내고 있는 인공조명의 요염하고 교태로운 빛과 현란하게 춤추는 색채의 유희를 통해, 비등하는 육체적 향연의 상징물에 대해 상상하게 만드는 버섯의 비틀린 자태를 통해 생의 환희와 열락과 욕망을 표현한다. 화려하면서도 우울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고통스러운 자기 번민의 파토스가 짙게 밴 그의 작품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 저 너머의 정신세계에 대한 가없는 염원을 담고 있다. 죽음보다 깊은 이 나락의 끝자락에 그는 한줄기 빛을 본다. 마치 단테가 빠졌던 깊은 회의의 수렁 속에서 간신히 부여잡았던 구원의 동아줄과도 같은. 이 깊은 심연을 이해할 때 우리는 그의 작품에 도달할 수 있다. 열광하면 할수록 더욱 멀어지는 세계, 그 끝에 그는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심영철의 작품에 대한 인상은 먼저 1,500권의 성서로 쌓아 올린 탑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그 순간, 나에게 충격이었고 힘이었다. 그리고 일곱 개의 무더기로 나타난 촛불은 계시록의 저 무서운 파국의 알레고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성서로 구축된 탑은 무너지기 쉬운 구조였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신앙의 두께 때문에 결코 붕괴되지 않을 성채로 버티고 서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아슬아슬하지만 역설적으로 견고한 축적의 흔적은 언제나 나의 뇌리에서 무거운 하중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편안하게 그를 잊어버리기로 했다. 나의 생활은 너무 바빴고, 그에 대해 더 깊이 기억하기엔 나의 세계관은 너무 달랐다.


 한 사람의 이교도로서, 방관자로서, 그러나 역설적인 관찰자로서 나는 그의 작품을 바라본다. 나의 뇌리를 자극하는 저 관능의 늪인 전자정원에 대해 이제 나는 말하려 한다. 여전히 편치 않은 심정으로 나는 그것이 분출하는 한없이 요염하면서 동시에 사색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그 비상한 마력에 대해 되새겨본다. 더욱이 버섯의 유기적인 형태와 그것을 감싸는 화려한 장식성은 또한 스테인레스 스틸의 기계적이고 중성적이며 차가운 금속성과 어울리는 기하학적인 구조와 병치됨으로써 우리의 상상력이 착륙해야 할 지점이 어딘지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 쪽에는 온갖 종류의 폐고철로 만들어진 상상의 식물이 성장하고 있고, 그 사이사이를 어둠의 질곡을 헤집으며 파고드는 신비로운 빛이 바야흐로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버섯들을 비추고 있다. 레디 메이드, 아상블라쥬, 정크 아트, 컴바인 스컵쳐, 누보 레알리슴, 인스톨레이션, 테크놀로지 아트, 사이버네틱스 등등 온갖 종류의 현대미술을 거룩하게 만드는 고상한 용어들이 나의 머리와 입가에서 제발 이렇게 규정해 달라고 조르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 회의하게 만드는 가운데 나는 그의 작품에 대해 전혀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나니 모든 예술은 이 혼돈의 후손이리라.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합의하듯이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동력, 비디오, 네온, 홀로그램, 광섬유, 컴퓨터,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전자제어장치 등을 이용한 작품을 발표해 왔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인류에게 문명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의 후계자이자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의 자손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작품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그는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어떤 물질이나 재료든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작품을 신앙이란 하나의 축으로 수렴시키고 있으나 단지 신앙고백이나 주관적인 자기최면, 더 나아가 작품을 교화(敎化)의 차원으로 축소하지 않는 개방성을 갖추도록 만드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려 함이라”(신약성서 로마서 제5장 3-4절 참조)라는 성서의 한 구절을 이번 전시의 주제로 내세운 그가 계획하고 있는 전시 구성방식을 보면 천지창조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자 한 의도를 간파할 수 있다. 우선 출입구로부터 제일 전면에 서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골조의 문과 만나게 된다. 이 골조는 구성주의자들의 조형물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을 통과해 들어가면 어두운 실내에 질서있게 놓여진 버섯의 군락(群落)과 만나게 된다. 나무판자로 조립된 이 기하학적 형태의 버섯은 마치 신작로의 가로수처럼 도열해 있다.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 속에서 부상(浮上)하는 이 버섯들은 신전을 지탱하는 초석이나 기둥 같기도 하고,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순례자들의 행렬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침 하나하나의 버섯 속에 조명을 장치함으로써 그 속으로부터 비쳐 나오는 빛에 의해 작품의 숭고성을 강조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길을 걸어 들어가다 만나는 한 공간에서 그가 몇 차례에 걸쳐 발표해 왔던 전자정원과 마주칠 수 있다. 이 전자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각종 기계부속으로부터 분리된 폐고철 오브제를 용접하여 만든 인간의 형상을 닮은 버섯과 마치 흙덩어리나 바위처럼 보이는 합성수지에 의해 포박 당해 있는 텔레비전 모니터들, 그리고 대리석, 브론즈 등으로 만들어진 버섯 등이다. 이 전자정원은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의 모방이라기보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가상(버츄얼 혹은 사이버) 공간이다. 단지 그 가상이 온갖 물질들로 구현되고 있을 따름이다. 기독교적 담론의 구성체인 이 전자정원은 기독교를 넘어선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과 그것에 의해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 아름다움의 중심에 에로티시즘이 자리하고 있다. 먼저 우리의 에로티시즘을 자극하는 것이 여체의 특정부위나 남성성을 상징하는 버섯의 그 형태임을 주목해 보자. 포자번식하는 버섯은 잘 알고 있는 바대로 습지에 기생한다. 그 색채가 아름다울수록 치명적인 독을 함유하고 있는 버섯은 풍부한 영양소를 지닌 음식물임과 아울러 생명체를 파멸시키는 균(菌)이기도 하다. 마치 사랑의 감정이 충만과 결핍의 부단한 교차는 물론 죽음의 충동과 불가분의 관계를 동반하듯 버섯은 영양공급과 독소(毒素), 우아한 아름다움과 혐오스러운 부패에의 유혹이란 이중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지에서 가장 가까운 지면에 자생하는 버섯은 대지의 자궁으로부터 발아하는 신비로운 생명체이기도 하다. 그 형태의 성적 특징만큼 생존의 조건에서도 특이한 에로티시즘을 자극하는 버섯의 형태의 유사한 형태를 지닌 토템을 숭배하는 다른 지역의 민간종교와 결부시켜 고찰해 보자.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동방정교회 정신에서 성상(Icon)이 수행하는 역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인도의 특이한 풍습에 대한 경험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엘리아데는 인도의 벵갈 지역에서 얼마 동안 지내는 동안 기혼녀와 처녀들이 링감(lingam)을 문지르는가 하면 온갖 꽃으로 장식하는 모습을 보았다. 링감이란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남자의 성기모양을 해부학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깎아 만든 석상인데 결혼한 여성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또한 생리학적으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지닌 상징에 대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모든 우주적 차원에서 드러나는 신비, 즉 생명과 창조성 그리고 풍요의 신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링감은 해부학적인 맥락으로 축소된 신체의 부위가 아니라 바로 생명의 현현인 시바(Shiva) 신을 뜻했다. 상(像)과 상징에 의해 전달 받을 수 있는 종교적 감동, 그 잠재 가능성이 그에게 정신적 가치의 세계를 총체적으로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아포스토로스-카파도나 : 알리아데 : 예술가, 평론가, 시인으로서의 학자, M. 엘리아데; 「상징 신성 예술」, 박규태 옮김, 서광사, p.17.> 이 링감이란 말은 힌두교에서 매우 중요한 말인 산스크리트어 링가(linga, 문자적으로 ‘성기’를 의미)는 ‘쟁기’를 의미하는 랑구라(Langula)와 관련이 있으며, 랑구라는 오스트레일리아 - 아시아적 어근인 라크(lak)에서 파생된 것이라 한다. 이때 라크는 삽이란 뜻과 남자의 생식기관이란 의미를 동시에 지닌 것으로서 여자가 땅에 비유된다면 남자의 성기는 삽으로, 그리고 파종은 성행위와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남자의 성기는 땅을 가는 농부의 생산행위에 비유된다. (앞의 책, p.36.)이것이야말로 자연에 동화하는 과정의 하나로서 성활동과 결부된 상징의 정신적 가치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심영철의 작품에서 중요한 대상인 버섯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은 남성성일 수도 있고 여성성일 수도 있으며, 죽음-버섯은 주검 위에 기생하지 않는가-의 음습함 위에 새로이 부활하는 생명의 신비에 대해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엘리아데가 주목했던 링감처럼 외양적인 형태의 유사성이 결국에는 생명의 연장, 풍요와 다산이란 맥락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겠다. 

 한편 나로서는 버섯이란 대상의 형태가 지닌 성적 특징이 아니라 이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아우라(aura)를 통해 에로스적 충동을 감지한다. 개별적으로 독립된 버섯들은 모두 그가 연모하는 ‘아름다운 그 님’이다. 아름다운 그 님이란 그를 사랑의 심연에 빠지게 만드는, 헤어날 수 없는 은총의 바다이자 신에 대한 메타퍼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넘어서는 -있을 법한- 다른 세계를 본다. 그것은 바로 에로스에의 욕망이다. 굳이 프로이트(S. Freud)의 정신분석학을 들추지 않더라도 에로스란 인간의 살고자 하는 욕망 즉, 종족 보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미의 여신이자 욕망의 상징인 아프로디테의 아들인 에로스, 영혼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프쉬케(Psyche)와의 사랑을 성취하는 에로스 신화는 신탁에 의해 파멸 될 수 밖에 없었으나 그것을 이겨내는 사랑의 승리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 사상가들은 에로스에 대해 다 같이 예찬 했었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플라톤의 「향연」에서 토론되고 있는 에로스일 것이다. 


 자기와 닮은 사람과 합쳐서 두 몸이 한 몸이 되려는 사랑, 그것은 우리 본래의 원초적 기원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적 욕망이다. 두 불완전한 존재가 합쳐서 온전한 한 존재가 되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에로스요, 신에 대한 우리 인간의 도전이랄까? 그런데 우리 인간은 신이 우리를 두 불안한 존재로 갈라 놓았다는 것을 모르고 살지 않는가? <플라톤의「향연」중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 부분(강월도 각색에서 인용)>


 물론 극작가 아가톤의 집에 초대 받은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하는 이 에로스에의 찬미가 향연의 결론은 아니다. 역시 이 향연에 초대 받았던 소크라테스는 그의 독특한 아이러니적 대화술 즉, 무지론(無知論)을 이용하여 여러 변설가(辯舌家)들의 주장에 담긴 허구를 뒤엎고 이데아에 도달하고자 하는 에로스가 궁극적인 것임을 증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육체적 사랑은 거부되지 않는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주어졌음이라” <구약성서 창세기편 제9장 1-2절 참고>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구약성서의 창세기 역시 피조물인 인간의 성의 교환을 통한 사랑의 구현을 부정하지 않는다. 에로티시즘은 생식의 특수한 한 형태임에는 분명하지만, 생식 혹은 자손의 번식이란 생물학적, 의학적 차원과는 다른 심리적 추구인 경우가 많다. 즉 에로티시즘은 성행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지만 비단 성교 뿐만 아니라 성과 관련한 개인적 열망과 집착은 물론 인류학적, 신화적, 심리적, 정신분석학적 문제와 결부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는 남녀간의 성애와 성적 욕망에 의해 추동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은 인간의 삶에 엄청난 무게를 차지하고 있으며, 신화와 예술은 곧잘 이러한 남녀간의 사랑(행위)을 주제로 설정한다. 성은 생식이란 측면과 쾌락이란 측면을 다 같이 충족시켜줌과 아울러 죽음과도 은밀하게 조우(遭遇)한다. 원시 모계사회에서 여성의 생식 능력에 대한 숭배를 보여주는 조각으로부터 남녀간의 교합을 곡식의 풍요와 결부시키고 있는 원시 부족의 풍습은 성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영철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에로스의 분위기는 이처럼 신화적 속성까지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샤머니즘과 결부 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가 성을 신성시한다기보다 인간의 조건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즉 삶의 한 과정이자 표현으로서 사랑의 감정과 성을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신에게로 향한 연모(戀慕)로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그의 작품 속에서 인간적인 관능성을 고조 시키는 형식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한껏 에로틱한 아우라를 내뿜는 그의 전자정원은 에덴의 동산이라기보다 문명의 최후를 보여주는 것 같은가 하면, 하느님이 벌했던 소돔과 고모라일 수도 있고, 과학기술에 의해 완성된 지상의 천년왕국일수도 있다. 나아가 심영철의 전자정원은 히에로니무스 보슈(Hieronymus Bosch)의 <열락의 동산>에 나타나는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포용한 세계이다. 소란스럽고 활달하며, 비록 각종 전자 감응장치에 의해 조명이 점멸하고 음향이 울려 나오는 상호작용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 정원은 유토피아라기 보다 동양 문화권에서 지향하는 이상향인 무릉도원(武陵桃源)이거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카디아’(Archadia)에 가까운 그런 세계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이 자체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 세계의 거울이며, 사랑이며, 미워하고, 태어나고 죽는 우리들의 초상인 것이다.

 인간 세계의 희로애락, 질서와 혼돈이 맞물린 전자정원은 그러나 그 속의 온갖 대상들을 비추고 있는 빛으로 하여 물질(육체)을 매개로 현상을 넘어서는 엑스타시스(ekstasis) 즉, 인간이 신의 합일에 도달하는 망아경(忘我鏡) 혹은 황홀의 신비적 상태에 도달하도록 유도한다. 그의 작품은 말하자면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법열>과도 같은 정신적 엑스타시로 충만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성인이 체험한 신앙의 기적, 신의 은총을 성적 환희의 지경으로 표현해 놓은 이 작품처럼 심영철은 육체적이고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는 에로스의 궁극점 즉, 소크라테스에 의해 증명된 진리와도 같은 완성된 사랑의 기쁨을 고조된 신앙의 열락, 그 절정의 형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쾌락의 대지를 벌한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저 구약 시대의 의로운 사람을 통해 에로스로부터 카리타스에 이르는 구원의 빛을 찾고자 한다. 

 가나안 신화에 따르면 야훼는 아담의 자손 라멕의 아들 노아의 시대에, 세상에 창궐하는 죄악을 징벌하기 위해 대홍수를 내리면서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만들어 그 속에 그의 자손과 모든 살아있는 짐승을 암수대로 실어 그 씨를 온 지상에 유전케 하라고 계시 했다고 한다. 과연 신의 저주대로 방주에 승선했던 짐승을 제외한 지상의 모든 짐승을 물로 쓸어버린 후 야훼는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언약으로 무지개를 내려 보냈다. 기독교인들은 홍수로부터의 구원을 세례의 상징으로 또한 노아의 방주를 교회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기독교 교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신화학의 맥락으로 보자면 대홍수는 구약성서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들의 전설적인 왕이자 신이기조차 했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시의 시에도 무서운 홍수로 인간을 징벌하는 구절이 나타나고 있다. 농경 사회의 모든 신화들은 식물의 생장과 땅의 건조, 수확과 기근, 탄생과 죽음 등의 자연 현상을 성적인 순환 과정과 같은 것으로 인식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고대 그리스 신화에 아도니스란 미소년을 두고 벌어졌던 아프로디테와 지하의 여신 페르세포네의 사랑 다툼으로 번역되었던 메소포타미아의 탐무즈 신화일 것이다. <J. C. Frazer;황금 가지, 김상일 역, 을유문화사, pp.407-410.>바빌로니아의 종교 문학에서 탐무즈는 자연 현상 속에서 생식의 구현인 모신(母神) 이시타르의 배우자이거나 애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기와 건기로 나눠지는 척박한 자연 환경 속에서 탐무즈는 매 년 죽어 즐거운 이승으로부터 음산한 저승으로 내려가는데 그의 애인이 그를 찾아 암흑의 집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그녀가 애인을 찾아 지하로 내려갈 때 사랑의 정열은 작용을 멈추므로 모든 생물은 생식 활동을 멈추게 되며 사멸의 위기를 맞이하다 그녀가 애인을 데리고 지상으로 되돌아오자 곧 땅은 재생의 활력을 회복하여 모든 생명체는 지상과 물 속에서 번성한다. 남녀의 사랑을 자연 현상에 대한 의인화의 양상으로 죽음과 결부 시켜 연인의 탄생과 죽음, 부활의 순환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는 이외에도 음유시인 오르페우스와 그의 아내 에우리뒤케에 읽힌 신화에도 나타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신의 축복은 곧 왕성한 생식 활동에 대한 예찬이라고 할 수 있다. 노아의 홍수는 성적 활동이 일시 중단된, 말하자면 이시타르가 지하로 내려간 시간과 같은 맥락이다. 방주는 모든 유성 생식하는 생물의 씨를 보존하는 곳간이자, 죽음의 음습한 침묵의 시간을 버텨낼 수 있는 대지의 자궁이다.

 심영철의 <노아의 방주>를 보며, 그 작품이 단지 기독교적 맥락에서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신비롭고 오묘한 순환 과정을 넘쳐나는 성적 에너지로 표현하고자 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 위에 무럭무럭 자라나는 버섯의 형상은 그 외양으로 보아 남근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죽음의 침묵 속에서도 성장을 멈추지 않고 생명을 잉태하는 생물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을 휘감고 있는 네온은 번성의 약속 즉,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약속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작품이 마냥성의 교환을 통한 생명의 보존과 번성을 예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재미있게도 그의 배에는 깃털로 눈을 가린 청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연히 이 그림은 파노프스키가 「도상학연구」에서 해석하고 있는 ‘눈 먼 큐피드’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E. Panofsky ; Studies in Iconology, Harper & Row, Pub., 1972, pp.95-128.>즉 르네상스 회화에서 큐피드-그는 미와 정염의 여신인 비너스(아프로디테)의 아들로서 그리스 신화에서는 에로스(사랑)로 나타나고 있으며, 프쉬케(영혼)와의 사이에서 자식인 ‘쾌락’을 낳았다-가 눈을 가린 채 나타나고 있는 것에는 기독교적 윤리관이 작용했기 때문이며, 육체적 쾌락에 대한 일종의 금기를 의미한다. 성서에도 성을 중요시하는 만큼이나 그것을 금기시하는 구절이 여기 저기 기록되어 있는데 노아의 기록에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노아는 신으로부터 선택 받은 의로운 존재임과 동시에 농업 기술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대홍수의 징벌 이후 땅에 정착한 노아는 포도나무를 재배하여 포도주를 만들었던 것이다. 어느 날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 잠든 노아의 하체를 그의 아들이자 가나안의 조상인 '함'이 보고 두 아들에게 이를 알렸는데, 잠에서 깬 노아가 '함'을 꾸짖으며, '함'의 자손이 다른 아들 샘의 자손의 종이 되리라고 저주했던 것이다. 노아의 아들 샘과 야벳은 잠든 아버지의 하체를 외면하며 옷으로 그것을 덮어준 반면 함은 단지 그것을 보고 부끄러움에 놀라 형제들에게 알리기만 했다. 더욱이 노아는 신성(의로운 존재)과 인성(술주정)을 다 함께 갖춘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외경(外經)에 따르면 노아의 술주정이, 포도주를 만들 때 사탄과 함께 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탄은 포도나무 뿌리에 도살한 어린양과 사자와 돼지와 원숭이의 피를 쏟아 부었다. 사탄은 노아에게 포도주의 성질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아의 저주는 신성한 언약의 행위라기 보다 사자의 난폭함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함'에 대한 노아의 저주는 성에 대한 위반과 금기란 고전적 규범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런 관점에서 심영철의 <노아의 방주>는 성 활동을 통한 종족의 번식에 대한 예찬, 즉 사랑 행위를 바탕으로 한 자연 현상에 대한 예찬이자 동시에 그것의 남용이 가져올 저주에 대한 경종이란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 

 축축한 습지에서 성장하는 버섯들은 또한 고대 이집트에서 습지의 신인 오시리스의 신체가 생명의 번식을 상징하는 녹색으로 표현되고 있듯이 모든 살아있는 것의 상징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가혹한 환경을 이겨낸 생명에게로 향한 경이(驚異)의 표현임과 동시에 자연에게로 바치는 경외감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무릇 신화와 에로티시즘은 동질성을 지닌다. 그의 작품에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주술적 분위기와 관능성, 자연과 제단(祭壇)으로서의 공간, 감각적이면서도 질서 있는 성장의 이미지는 성의 교환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임과 아울러 홍수의 대재난 이후에 노아가 무지개를 보고 찬미했던 것처럼 신의 은총에 대한 경건한 자기 투여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에게로 귀의 하고자 하는 그의 의식이 종국에 도달하는 지점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썼던 가시면류관이 존재한다. 지난(至難)한 고통의 과정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사랑은 이 가시면류관에 이르러 대단원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해 그의 작품에 특징적인 시각적인 파노라마는 인간적인 에로스로부터 통상 아가페(agape)로 알려진 신의 초자연적인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세 가지 덕인 신앙, 희망, 사랑 중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을 의미하는 카리타스(caritas)에로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심영철의 작품은 영어에서 말하고 있는 이기주의(egoism)와는 다른 맥락에서 작가가 자기의 육체적, 정신적 개방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잇다는 점에서 스탕달이 사용한 에고티즘(egotisme)의 상태 즉 자아 존엄성을 보여준다. 결국 본다는 것이 원죄의 기원이 아니라 보는 행위를 통해 경건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음을 그는 매우 역설적인 방식으로, 현란하고 관능적인 가상의 세계를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최 태 만 / 미술평론가


1997.5  워커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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