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에덴동산은 존재하는가? - 김진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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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에덴동산은 존재하는가?
1.
성경 속의 에덴동산은 ‘행복·축복·기쁨’이 충만한 파라다이스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아담과 하와는 불경스러운 죄를 저질러 축복의 동산에서 쫓겨났고, 그 이후 인간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된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탐욕과 맹목적인 집착은 전쟁과 살육을 낳았고 인간들의 땅에는 고통이 넘쳐나게 되었다.
근대 이후 인간들은 과학과 이성을 통해 새로운 에덴동산을 꿈꿨지만, 현대사회는 더욱 가공할 전쟁, 기아와 공포, 무엇보다도 소외된 인간으로 하루하루를 영위하는 또 다른 징벌들이 인간들을 휘감고 있다.
심영철의 ‘…정원’은 바로 새로운 에덴동산을 꿈꾸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서 탄생한 세계는 상상이나 관념, 도피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새로운 구원을 꿈꾸는 영원한 세계를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심영철이 주목하는 것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이다.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인간들의 욕망을 자신의 정원으로 끌어들여 중화시키고 조화시켜 새로운 삶의 관계 망을 형성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궁극적으로 종교·예술·과학 같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사회적 형식들을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고, 또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여 다양한 소통구조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정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심영철은 전통 조각에서 출발한 이후, 미국 유학 시절 테크놀로지를 접하면서 설치미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미디어와 전통 소재를 결합하는 작업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심영철의 작업 과정을 시간적 의미로 보면 직선적인 단일의 시간에서 나선형의 시간으로, 공간적 의미에서는 한정되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다층적인 열린 공간으로 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한국미술사에서 의미 있는 것은,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 한국현대미술에서 나타났던 새로운 장르들이 심영철의 작업에 일부분이든 전반적이든 모두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작업 여정은 작업 초기부터 설정된 개념을 꾸준히 확립하거나, 작업 중간에 급격한 변모를 통해 전혀 새로운 작업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심영철의 경우는 조금 특이하다. 일관적으로 진행되는 작업의 흐름이 있는데 이것이 부분적으로 계속 변화하여 왔고, 그 부분적인 변화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체적으로 변화를 가져 온다는 것이다. 즉 단계적으로 새로운 작업이 계속 나타나지만 과거의 작업들이 계속해서 공존하고 있고. 이를 통해 또 다른 새로운 영역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치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처럼 심영철의 작업의 여정에서는 지속적인 순환이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
미술평론가 김영호는 초기부터 2010년대까지의 심영철의 작업을 대략 여섯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빗의 조형-메시지-전자정원-모뉴멘탈 가든, 환상 공간-퍼포먼스 & 비디오‘로 구분하고 각각의 표현 방식으로 조소, 설치미술 등의 작업을 예시하고 있다.
작업 초기의 ‘빗의 조형’은 한국의 전통적인 빗을 소재로 한 나무, 돌조각 연작을 통해 여성성에 대한 내밀한 문제의식을 제기한 시기이다. 이후 심영철은 5년간의 미국 유학 생활 동안 테크놀로지에 대한 매력을 통해 새로운 표현 매체에 주목하게 된다. 기존의 자연적인 재료와 미디어 중심의 공학적인 기술들을 연결하여 새로운 조형언어를 찾아내는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귀국 후 꾸준히 이러한 융·복합적인 결과물들을 발표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1990년대의 연작 ‘전자 정원(electronic garden)’이다. 물, 불, 흙 등의 자연 물질과 3차원 영상, 홀로그램, 터치스크린, 전자·전기 등 첨단 과학기술을 결합하면서 테크놀로지를 통해 예술과 비예술,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메시지’를 중심으로 한 자신의 목소리로 작업의 중심을 삼았다. 국내 최초의 인터랙티브 아트로 큰 호응을 얻은 1993년 대전엑스포에서 전시된 ‘전자 정원’ 연작은 홀로그램 등 첨단 기법을 도입하였고, 마음속에 자리한 에덴동산을 과학과 예술을 결합한 새로운 낙원을 제시한 것이다.
주로 ‘전자 꽃’이 중심이 된 ‘전자정원’은 몽환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진지함을 동시에 표현하는 실험적인 작업들이었다. 특히 대형 ‘도라지꽃’ 은 쇳물을 녹여 만든 거대한 도라지꽃은, 주물로 길게 만들어진 줄기를 통해 암술과 수술이 어우러지면서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일상과 예술과,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꽃은 유토피아와 현실이 교차하는 경계의 세계로 동양적인 의미의 음과 양처럼 변화를 통해 새로운 삶이 태어나는 곳이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구분도 없고 금제도 없다. 신화의 에덴이 ‘금제’를 통해 유지되었다면 ‘꽃의 세계’는 자유로운 인간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고, 의식과 무의식이 공존하면서 ‘사랑’을 통해 모든 것이 화해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이러한 전자 정원 작업은 작가로서의 인식의 틀을 변화시키는 계기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예술가로서도 우리 사회의 폐쇄적인 틀 속에서 독자적인 존재로서 삶의 긍정성을 획득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미래로 나아가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자로서 본인을 확립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전자 정원’에서 구축한 자신 만의 세계를 통해 심영철의 작업은 고유의 조형언어를 섬세하게 확장시킨다. 이러한 결과로 나타나나 것이 2000년대의 ’기념비적 정원’(monumental garden)’과 ‘비밀 정원’(secret garden) 연작들이다.
화려한 색상의 유리 등을 소재로 한 ‘기념비적 정원’은 야외조각의 형태에 초점을 맞추면서 ‘전자정원’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의미에 집중하였고, 생성과 소멸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연작이다. ‘비밀 정원’은 내밀한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것으로 전작들의 화려함보다는 자수정·옥 등의 원석들을 이용하여 절제된 색채를 사용하였다. 특히 쉽게 부서질 듯 보이지만 소재가 강한 원석들을 통해 자신에 대한 긍정을 강하게 암시한다.
2010년대 이전까지의 작업들이 절대 시간과 공간 개념의 부인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상대적인 측면의 탐색을 구체화했다면, 2010년대 이후의 작업들은 시공간이 물질과 마찬가지로 동영학을 가진다는 양자역학의 개념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물이 스테인리스 스틸 구슬 등을 활용한 ‘매트릭스 가든’이다. 심영철은 더 심오한 차원으로 들어서기 위해 ‘매트릭스 가든’을 주제로 정했다고 이야기 한다.
“수백개의 구슬에 투영되는 너와 나의 모습, 천장과 바닥에 반사돼 다시금 무한 복제되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가상과 현실, 우주의 매트릭스 구조를 보여주고 싶다.”
‘매드릭스 가든’의 작품들은 그의 작업세계가 전혀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정원에서 작가는 오랜 미디어 아트 작업에서 축적된 역량을 인간, 생명, 우주 같은 심오하고도 원대한 주제로 풀어냈다. 이로써 보다 넓고 심화된 조형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매트릭스 가든’에서는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의 구슬을 기본 단위로 사용된다. 여기 원형형태의 구슬은 이미 이전의 ‘전자 정원’ 연작에서 부터 사용된 반구 등 다양한 형태의 원형들을 축약시킨 것으로 생명의 원천을 상징하고 있다. 작은 구슬이지만 눈앞의 모든 풍경을 품고 있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 축약되어 있는 것이다. 또 버섯 형태들은 남근을 상징하고 느타리버섯의 형태들은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매트릭스 가든은 바로 생명이 탄생하는 자궁 같은 것으로 문명과 환경 이전의 원초적인 상황으로 시간과 공간도 물질처럼 작용하는 곳이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인간과 사회가 문제시 되지 않는다.
‘매트릭스’란 눈앞의 문을 열면 그 안쪽에 또 다른 문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아득하고 무한 증식되는 세계를 가리킨다. 종축, 횡축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매트릭스 개념은 작가와 작품, 감상자의 거리도 넘어선다. 매트릭스의 세계는 ‘나-너’가 함께하는 공간으로 더 이상 인간의 말은 의미가 없고 서로의 울림에 의해서 공감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어떠한 결과도 짐작할 수 없는 다만 자유롭게 부유하는 공간이며 심영철이 추구하는 ‘에덴’의 의미가 여기서 만개하는 것이다.
3.
지난 2014년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초대전 ‘춤추는 정원’은 기존의 심영철의 작업들이 총망라된 전시로서, ‘전자 정원’부터 ‘매트릭스 정원’까지의 주요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춤추는 정원’이라는 제목은 작업 초기부터 전시와 함께 이루어진 퍼포먼스를 조망한다는 의미 외에도, 퍼포먼스라는 장르가 심영철이 추구했던 ‘정원’시리즈의 한 부분임을 알리는 것이었다.
자유로운 정원에서 부유하는 새처럼, 나비처럼, 나뭇잎처럼 현재와 과거, 미래를 부유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바로 ‘춤추는 정원’에 담겨져 있다. 심영철은 2020년대 새로운 몸짓을 준비한다. 그 새로운 울림은 단지 내일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현재-미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하루하루가 우리에게는 에덴인 것이다. 직선적인 시간이나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과 부유하는 시간에서 그의 울림은 영원히 퍼져나갈 것이다.
김진엽(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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