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에덴동산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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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에덴동산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고충환
1990년 아님 91년으로 기억된다. 당시 필자는 한 화랑에 기숙하고 있었다. 그때 심영철 작가의 전시며 작품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전인가 아님 이후. 근처에 있는 한 갤러리에서 작품을 본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둠 속에서 은근한 빛을 발하는 네온이 장착된 조형작업이었다. 가시나무와 어우러진 둥근 형태의 네온이 발하는 빛은 아마도 예수가 머리에 썼던 가시관을 형상화한 것이리라. 이 네온조형작업을 전후로 열린 전시에서 작가는 성경책을 피라미드 형태로 쌓았고, 공간에는 가시철망이 둘러쳐져 있었고, 박제된 사슴의 뿔에서 불꽃이 일었던 것 같다. 작가는 전시기간 중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성경책을 나눠주었다. 성경책을 피라미드로 쌓은 것은 아마도 애급에서의 엑소더스를 상징할 것이고, 가시철망 속에서 불을 뿜는 사슴의 뿔은 가시덤불을 태우지 않으면서 불꽃으로 화한 신의 현현을 상징할 것이다. 이후 작가의 다른 작업에서 신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화신하기도 했다. 애급에서의 엑소더스 내내 찌는 듯한 더위와 살을 에는 추위로부터 자신의 선민을 보호하기 위해 신이 각각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현신한 것이다. 그렇게 신은 자신의 선민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지상낙원에 흐르는 젖과 꿀은 다름 아닌 석유인 것으로 밝혀졌고, 역사의 아이러니랄 것이 그곳은 정작 낙원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첨예한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
전에도 그랬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작가는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였다. 다르게는 무당이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알다시피 산자와 죽은 자의 영역을 넘나들고, 특히 의미와 무의미를 중재하는 현대판 무당은 예술과 관련이 깊다. 제주현대미술관 개관 7주년을 기념해 열린, 작가 개인적으론 작업을 시작한지 30년에 이른 그동안의 작업의 성과를 회고해보는, 사실상의 준 회고전 형식으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가는 대개 설치와 퍼포먼스를 병행하는데, 이번 전시에서도 퍼포먼스로 전시를 열었다. 기독교의 창세신화 중 원죄의식을 다룬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원죄의식이 최초로 싹튼 에덴동산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극장에는 신과 사탄, 그리고 아담과 이브가 각각 출연한다. 지혜의 나무로 알려진 선악과를 매개로 뱀(사탄)이 이브를 유혹하고, 이브는 아담을 유혹한다. 그리고 욕망을 책망하는 신의 목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린다(작가 자신이 직접 허밍으로 처리한).
대충 이런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여기서 일말의 의문이 든다. 애초에 선악과가 없었더라면 욕망도 유혹도 처벌도 원죄의식도 없었을 것이다. 금지가 욕망을 부르고 욕망이 위반을 부르는, 그리고 위반이 처벌을 위한 당위성을 제공한다는 논리 그대로가 아닌가. 그러므로 어쩌면 금지는 처음부터 처벌을 전제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쩌면 원죄의식 내러티브는 신과 사탄의 싸움에 인간을 끌어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사탄을 자기 아래 두려는 신의 의지(사탄은 유혹하고 신은 처벌하는)와 여자를 자기에게 종속시키려는 남자의 이해관계(여자는 유혹하고 남자는 책망하는)가 부합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창세신화도 원죄의식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만든 것이라는 페미니즘의 입장을 대변해본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욕망이 금지와 함께 태어났다는 태생적 왜곡을 주지시키는 것이리라(금지는 없는 욕망도 만들어낸다. 그리고 모든 신화에는 거의 어김없이 이런 금지와 위반의 서사가 등장한다). 따라서 신의 말씀(로고스와 로직, 이성과 논리)대로 되었다는 창세신화는 사실은 각본대로 되었다는 전복적 읽기로 대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상낙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하늘에선 그 일이 낱낱이 기록되고 반영된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는 근작의 메인 콘셉트에 해당하는 매트릭스가든 시리즈에서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원형을 도입한다. 그리고 똑같은 소재와 재질과 크기의 원형을 상하좌우로 겹겹이 병렬시켜 공중에 매단다. 사실상 무한 병렬되는 것을 임의적으로 한정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여기서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구는 매끄러운 표면으로 인해 이미지를 반영하는 거울 역할을 한다. 낙원에서 일어나는 일 곧 원죄의식이 막 생성되는(조작되고 만들어지는?) 극적인 순간이며 사건을 반영하고 퍼트려 서로의 무의식에 아로새긴다. 나는 너의 반영이고, 너는 나의 거울이다. 나는 너의 원죄의식을 반영하는 분신이고, 너는 나의 원죄의식을 되비치는 타자이다.
불교에선 존재가 존재를 되비치는, 그리고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무한 반영되는 유리구슬로 엮인 그물을 인드라망이라고 한다. 나는 너의 업이고, 너는 나의 연이다. 나는 너의 원인이고, 너는 나의 결과이다. 그래서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너이기도 하다. 존재와 존재의 무한반영이며 무한연쇄를 의미하는 것이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도 모를 연기설과도 통하는 개념이다. 작가의 매트릭스 가든은 바로 그런 존재의 그물망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매트릭스는 우주의 자궁을 의미한다. 혹자는 카오스라고도 하고, 혹자는 블랙홀 아님 화이트홀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이미지를 무한 반영하는 만화경에 비유하기도 한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상(이미지)인가.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그림자인가. 존재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차이 나는 의미들이며 의문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개념(푸코 식으로 치자면 유사와 비교되는 상사가 되겠고, 들뢰즈 식으로 치자면 리좀을 파생시키는 뿌리의 뿌리에 해당하는?) 정도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매트릭스 가든을 통해 나는 너를 반영하고 너는 나를 반영하는, 그리고 그렇게 존재와 존재가 무한 반영되는, 마치 만화경 속 정경과도 같은 존재의 거울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신은 사탄을 반영하고 사탄은 신을 반영한다면, 남자는 여자를 반영하고 여자는 남자를 반영한다면(여자는 남자의 미래)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선은 악을 잠재하고 악은 선을 품고 있다는 존재의 양가성을 들이댄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일까.
그렇게 작가의 매트릭스 가든은 우주의 자궁으로 열리고 존재의 만화경을 열어 놓는다. 어쩌면 보들리야르의 진단 곧 우리는 이미 가상현실을 현실로 살고 있다는 진단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다만 반영과 반영(반영하는 것과 반영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의 매트릭스 가든은 에덴동산의 반영이었고, 지상낙원의 반영이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된 땅의 반영이었고, 유토피아의 반영이었다. 매트릭스 가든은 일렉트로닉 가든의 반영이었고, 일렉트로닉 가든은 모뉴멘탈 가든의 반영이었고, 모뉴멘탈 가든은 시크릿 가든의 반영이었고, 시크릿 가든은 에덴동산의 반영이었다(여기서 에덴동산의 반영이 시크릿 가든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왜 시크릿인가. 에덴에는 무슨 말 못할 사정이나 사연이라도 숨기고 있었는가. 에덴에는 동산과 함께 동쪽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그렇다면 반영의 원형은 어디에 있는가. 애초에 원형이라고 부를 만한 실체가 있었는가. 혹 그것은 다만 스테레오타입 아님 도돌이 음표의 반복변주는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면 작가의 작업은 온통 반영이었다. 홀로그램이 그렇고, 플라즈마가 그렇고, 영상이 그렇고, 거울이 그렇고,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무한 반복되는 구슬이 그렇다. 작가의 작업 어디에도 정작 손에 잡히는 실체는 없었다. 다만 반영하고 반영되는 무한반영이 있을 뿐. 그리고 그렇게 약속된 땅에서, 원형 없는 반영의 땅에서, 밑도 끝도 없이 반영하고 반영되는 만화경 속에서 아담은 불현듯(어쩜 악몽과도 같은) 잠을 깬다. 작가의 작업의 표면이 종교적 내러티브라고 한다면, 그 표층을 뚫고 작업의 밑바닥 내지 무의식의 지층에 면면히 흐르는 이런 무한 반영되는(어쩜 실체 없는 것을 쫒는) 놀이 내지 유희에 주목할 일이다. 어쩜 작가의 작업의 묘미는 종교적 신념 내지 믿음처럼 센 것과 실체 없는 것들이며 희박한 것들이 하나로 만나지는 이율배반적인 지점에 모아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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